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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2개월 정도 정신과 시간의 방(드래곤볼과 달리 시간은 현실시간 그대로 흘러가는)에서 또 수련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일도 너무 많고 날씨도 덥고 벽간소음까지 더해 신경이 날카로워지니까 온갖 미세한 소리도 칠판 긁는 소리처럼 고통스럽게 들리기만 하더군요. 방에 박혀 있는 동안 머리나 좀 길러보자 했는데 머리가 기니까 감고 났을 때 뭉터기로 빠져 있는 비주얼이 너무 파.멸.적.이어서 그냥 다시 짧게 잘랐습니다.
곧 있으면 취업하고 1년이 되는지라, 잠깐 회고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이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자꾸 감정 배설하려고만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서 개발/기술 관련 게시글을 기대하시는 분께는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준비해 놓은 주제들은 좀 있는데 이게 주말에 글을 작성하려니까 좀처럼 손이 가질 않습니다. 읽으려고 쌓아 놓은 책들도 산더미고... 숙제만 자꾸 쌓이고 있네요.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방송인 장동민 씨가 한 방송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일했지만 판잣집을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하며 이를 반면교사 삼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음을 시사하는 장면이 제 기억에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장동민 씨에 비해 저는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더 바라고 요구할 만한 환경은 아니었고, 부모님은 늘 열심히 살았음에도 여건이 크게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상태였었죠.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돌이켜보니 두 분 다 삶을 영리하게 사는 유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뿐.
지금 2030이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언론에서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욕심이 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똑똑하게 사는 걸까? 알바생이 최저 받으면서 알바한다고 받은 만큼만 적당히 하면 되는 것일까?
고민 끝에 내린 제 결론은
-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 주어진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라는 인간은 원체 계획이라는 것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지라 목표를 그렇게 구체적이고 거창하게 정하진 않았습니다. 대략적으로 수습 통과하기 전에는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고, 현재로서는 단기간에 시니어급 재량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커리어를 좀 늦게 시작한 것도 있고, AI가 상당히 위협적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한 것도 있고 해서, 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AI랑 비빌 수 있는 인간 병기 청소도구 수준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년간 얼마나 성장을 했는가? 사실 코딩 실력은 별로 나아진 게 없습니다. 오히려 AI 의존도만 높아졌어요. 진짜 ㅈ 됐습니다... 하지만 도메인 지식과 회사/제품에 대한 맥락이 풍부해졌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web3라는 업계 자체가 사람도 부족하고 특수한 만큼 도메인 지식이 가지는 영향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암호화폐 지갑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한테 질문이 들어오는 횟수가 많아졌다는 점도 있는데, AI한테 질문하는 입장에서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또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가 분명하니, 불필요한 시도는 빠르게 걸러내고 가능한 쪽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뭐 web2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 web3 업계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될까요? 똑똑한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하게 똑똑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만들었는지 유독 지랄 맞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생각해 보니까 개열받는 게 왜 이더리움 콜데이터를 바이트열로 만들어서 내가 function selector보고 무슨 표준의 어떤 메서드를 호출했는지 확인하고 function signature 찾아서 콜데이터 디코딩한 다음에 누가 누구한테 얼마 보내는지를 사용자에게 예쁘게 보여주는 것까지 일일이 다 수작업으로 처리해줘야 하는 거지??? 진짜 비탈릭 내 눈에 띄지 마라.)
기존에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관련해서 좀 파놨던 것들을 기반으로 코스모스, 스타크넷 등으로 영역 확장을 하니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는데, 그것보다는 그냥 일을 많이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또 이론보다 직접 돌려봐야 이해가 잘 되는 편이거든요. 그냥 시키는 것도 다 하고 남는 것도 손에 짚이는 대로 다 했어요.
없으면 만들어서도 했어요. 이거는 좀 조심스러운 게 '이제 막 들어온 자가 뭘 아느냐', '괜히 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하지 마라' 눈칫밥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진짜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제안하거나 기획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은밀하게 섞어 넣고 있습니다. 트랜잭션 시뮬레이션하는 기능도 필요 없다는 거 일단 만들어놓고 설득한 적도 있습니다. 쥰내 피곤하게 없는 일 만드는 인간으로 보일지라도, 사용자를 생각하는 이 사람의 마음만큼은 알아주세요.
제가 오피셜로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ADHD 증세가 있습니다. 슬랙에 빨간불 들어오면 그거 확인을 해야만 합니다. 집중이 잘 안 되고 와리가리 치는 제자신이 싫었어요. 그런데 이게 예상외로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 무슨 일을 하고 있고, 회사 내부 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 확인/예상이 가능해서 뭔가 수상하게 많이 알고 있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은 티는 내지 마세요. 괜히 일만 늘어납니다.
최종적인 커리어 목표는 '잘 만드는 개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 개발 잘하는 개발자는 천지 삐까리인데 생각보다 잘 만드는 개발자는 별로 없는 것 같더군요. 잘 만든다는 것은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드는'으로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UI/UX를 고려할 줄 알고, 팀을 유연하게 통솔하고, 시장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삼국지연의의 제갈량, 정사 순욱같은 만능캐 포지션의 그런 개발자. 사실 저도 아직 잘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그냥 이것저것 다 잘하고 싶어서 붙여본 타이틀이에요. 다만 잘 만들기 위해서는 팀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혼자 잘나서 원맨쇼 한다고 잘 만들 수 없어요. 이거는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해서 나중에 다시 들고 오겠습니다.
그 외에도 캥거루 탈출이나 여친 만들기 같은 목표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근데 우선 앞으로 한 일 년 정도는 더 커리어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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