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명상록을 처음 사게 된 이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좀 오래된 일이니까. 분명 뭔가 멋있어 보여서 샀을 게 분명해. 출판사도 민음사 표지보다는 현대지성 크라싁 표지가 더 멋진 거 같아서 그걸로 샀었던 걸로 기억한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검소하고 청렴한데 성찰까지 잘해서, 본인은 일기 비슷하게 쓴 게 사후에 철학서로 추앙받을 것이라고는 황제 본인도 예상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점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잘해야 1/4 정도 읽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
본능보다는 이성을 따르는 삶을 살 것
공동체의 번영을 위할 것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을 것
뒤로 가면 뭔가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은 이런 주제들이 반복된다. 패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읽지 않아도 될 거 같다고 감지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 위에 먼지가 어느정도 쌓이면 다시 생각나서 재도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앞부분만 찔끔 읽고 다시 먼지가 쌓이는 시간을 기다리곤 한다.
최근에 와서 ai도 그렇고 암호화폐 업계 상황도 그렇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내가 직간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상황이 자꾸 벌어지고-벌어지려 하니까, 나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마음가짐을 어떻게 설정하면 좋을까 싶어서 명상록이 다시 생각나게 되었다.
그런데 매 번 실패하니까 이번에는 좀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필사본을 사는 돈지랄을 해버렸다. 손으로 써야 되니까 더 귀찮아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겨우 연필을 잡은 것이 지난 4월 초순 어느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세 페이지 필사하고 '하, 그래.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뻐하며 받아들여야지'하고 뿌듯한 상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대뾰님의 호출. 그리고 이어지는 파멸적인 감원 계획(이제 말해도 되겠지?). 우와 이거는 절대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네.
다른 팀원분들 어쩌지 걱정도 되고, 나만 살아남은 것 같아서 미안해지기도 하고, 그 와중에 나는 살아남았구나 안도도 되고, 혹시나 대뾰님 맘 변해서 내 모가지도 날아가면 어쩌지 불안하기도 하고, 만들던 제품은 어떻게 될지 씁쓸하기도 하고, 팀원들 떠나고 남을 빈 공간을 생각하자니 공허해지기도 하고. 몇 날 며칠 울었던 거 같다.
대머리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탈모약이라도 먹어보면서 저항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이런 거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지 싶었다. 더 운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고 누구 붙들고 두드리 팬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사실 나한테도 선택권이 있었다. 퇴사자 패키지받고 나갈지, 아니면 남아서 같이 새로운 거 해볼지. 시장 꼬라지를 보면 재취업도 어려우니 닥후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납득할 수 있을만한 이유.
나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항상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않고 피하고 도망쳤던 기억들 뿐이다. 부끄러워서 그랬다기 보다는 어차피 다시 안 볼 건데 굳이? 하는 귀찮음 도 있었고, 마무리 과정에서 이별이나 관계의 단절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 너무 큰 슬픔으로 다가올까 봐 두려웠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망쳤던 기억들은 후회로 남아있다. 그때 그랬더라면. 이것이 INFP의 기질이자 숙명일까?
이번에는 도망치지않고 마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는 자기 합리화일 수는 있겠지만 리더 자리를 맡게 되었고 자랑스러운 팀이 함께 만든 제품의 관리 및 개발을 내가 선택한 이상, 그리고 내 사랑을 받아 마땅한 것이 되어버린 이상, 기회가 닿는 한 뭐 장례식까지는 못 가더라도 요양원 정도는 내 손으로 에스코트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다 내 인생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 것 같으면 중간에 내빼기야 하겠지만. 그리고 새로 하고자 하는 것도 내 관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좋은 일도 있었다. 그동안 친해지고 싶었지만 머뭇거리기만 했었던 분이 있는데 마지막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니, 기쁘게도 교류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는것을 선택했지만 기질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것은 의식적으로 눌러주지 않으면 다시 사고를 치고 말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렇게 공개된 블로그에 적어보는 것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비밀 일기장에 적고 카미 사마가 지켜보고 있어 - 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신님의 시선은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의식이 안된다고 할까. 그러므로 이 자식은 적어도 뭐가 문제인지 알고 개선하려고 하는구나, 그런 식으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으니 대단히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명상록에서 묘사하는 삶을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오늘도 자기 전에 필사본 세 페이지 적고 자야겠다.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힘 그 자체를 두려워해선 안되노라 (1) | 2026.04.05 |
|---|---|
| 지와 형상 (0) | 2026.01.04 |
| 되고 싶은 어른 (0) | 2025.11.16 |
| AI의 발전은 두렵지만 (0) | 2025.09.20 |
| 어떻게 살고 있는가 (5) | 2025.08.31 |
